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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포에니 전쟁 승리, 세력 확장, 로마 번성 이유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반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테베레 강 하류에 세워진 농업 기반의 도시 국가였다. 중장 보병을 앞세워 세력을 키운 로마는 기원전 270년 무렵에야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로마는 왕정으로 시작했으나 귀족들이 왕을 내쫓고 원로원과 집정관이 다스리는 공화정 체제로 전환했다. 농업 국가였던 로마는 점차 바다로 눈을 돌려 지중해 무역에 나섰고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로마는 서지중해 상권을 쥐고 있던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되었다. 200년간 카르타고와 세차레 포에니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포에니는 페니키아인을 뜻하는 라틴어 포에니쿠스(Poenicus)에서 온 말로 카르타고가 페키니아의 식민도시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264-241년 시칠리아 섬에서 벌어진 1차 포에니전쟁은 접전 끝에 로마가 승리했다. 그러나 한니발 전쟁으로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산맥을 넘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활약에 밀려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유린항했다. 로마는 지구전과 게릴라전으로 전쟁을 장기화하면서 열세를 만회했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퇴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에스파냐, 코르시카, 샤르데냐 등 해외 영토를 모두 잃고 몰락했다. 3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부를 탐낸 로마의 정복전쟁으로 로마는 북아프리카까지 영토를 넓혔다.

로마는 기원전 2세기에 지중해의 일인자가 될 수 있었을까? 플루타코스는 패배한 민족까지 포용해 동화시키는 로마인의 포용성을 이유로 꼽았다. 고대 그리스는 이민족을 모두 야만인으로 보았지만,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라틴족에 대해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시민권을 주었다. 적국 출신이어도 일정기간 로마에서 살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성장원인을 정치체제의 유연성으로 꼽았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는 집정관 제도로 왕정의 장점을 살리고, 원로원 제도로 귀족정의 장점을 살렸으며, 민회를 통해 민주정의 장점을 살렸다.

기원전 1세기에는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갈리아(프랑스), 브리타니아(영국), 게르마니아(독일)까지 확장했다. 기원전 30년에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를 굴복시키고 흑해 연안의 아르메니아까지 넓혔다.

로마는 민족, 종교, 인종, 피부색이 다른 수많은 이민족을 포용하고 동화시킨 관용이 로마의 최대 강점이었다.

아우쿠스투스부터 5현제시대(96~180)의 약 200년간 이어진 로마의 전성기를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 로마는 드넓은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촘촘한 도로망과 수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포장도로만 85,000km에 달할 정도였다. 최전성기에는 113개에 달하는 속주를 372개 간선도로로 연결했다.

정복지의 수많은 이민족을 다스리려면 관용만으로 불가능했기에 근대 법률의 뿌리가 된 로마법을 제정했다. 로마법은 기원전 450년 제정된 12표법에서 출발해 귀족과 평민의 권리를 규정한 시민법을 거쳐 3세기에는 만민법으로 발전했다. 그뒤 6세기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로마법을 집대성해 '로마법대전'을 편찬하였다